2014년 7월 16일 수요일

구원의 문제 (4)

구원의 적용의 시간적인 틀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 이후라고 본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질 때, 구원의 완성과 적용이 동시에 주어진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단회적 사건과 지속적 사건의 차이를 놓고 그 순서를 정한다면,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구원의 완성이 구원의 적용의 근거라고 볼 수 있고, 실재로 성경도 그러한 부분을 지지하기 때문에, 완성이후에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적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구조는 두 가지 큰 축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설명 내지는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고 누리고 이루어가는 삶 내지는 역사"이다.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부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시는 장면이 담긴 출애굽기 20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 번째 계명이 시작되기 전인 2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리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내용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이 십계명을 주시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말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십계명을 이스라엘이 지켜나가야 하는 "근거"와 "당위성"을 제공하여 준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주셨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보이는 순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이 근거가 되어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인 "구원의 적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 사실은 구원의 적용의 문제를 생각하고 받아들일 때, 매우 중요한 타당성의 근거가 된다.

2014년 7월 5일 토요일

구원의 문제 (3)

그렇다면, 구원의 적용은 무엇인가?

구원의 적용으로 넘어가기 전에, 구원의 완성과 적용이 가지는 시간적인 틀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종결된 구원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반복되어 일어날 필요가 없는 "단회적"인 사건이다. 이미 완성되어진 구원의 역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려고 다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구원의 적용은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의 유익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적이고 발전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미 완성되어진 구원의 역사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아직"이라는 긴장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며 그 삶을 인도하여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차이는 중요한 것을 상정한다. 즉,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복적으로 이루며 경험하여 가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해준다. 단회적 사건인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예수님과의 연합'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이루어지고, 그렇게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한 사람은 그의 삶을 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구원의 적용'의 과정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소위 "구원의 확신"에 관한 쟁점도 이러한 시간적인 틀을 고려함으로써 성경적인 답변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014년 7월 3일 목요일

구원의 문제 (2)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성경은 이 구원을 두 가지 측면을 드러내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구원의 측면은 구원의 완성과 구원의 적용이다.

먼저, 구원의 완성을 생각해보자.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하신 사실을 말한다. 구속사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이라고도 부른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구약에서도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사실이라는 것은 참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다. 가장 분명한 예는,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이 주어지는 과정과 그 내용에 드러난다.

보통 십계명을 생각할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출애굽기 20장 1~2절인데, 거기에서, 이 십계명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지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기록되어 있다.

WTT Exodus 20:2 אָנֹכִי יְהוָה אֱלֹהֶיךָ אֲשֶׁר הוֹצֵאתִיךָ מֵאֶרֶץ מִצְרַיִם מִבֵּית עֲבָדִים
BGT  Exodus 20:2 ἐγώ εἰμι κύριος ὁ θεός σου ὅστις ἐξήγαγόν σε ἐκ γῆς Αἰγύπτου ἐξ οἴκου δουλείας
ESV  Exodus 20:2 "I am the LORD your God, who brought you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slavery.
KRV  Exodus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여기에 등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신 그들의 하나님 곧, 그들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그러한 신분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구원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그의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드러내시는 말씀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심과 더 나아가 그들을 구원하심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자격조건을 갖추어서 이루어진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구원하심은 사람이 가진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심이며 동시에,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고 세워주셨다고 한다면, 3절이하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십계명의 내용들은 그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삶의 방향이 된다는 사실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7월 2일 수요일

구원의 문제 (1)

구원의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부터 구별시키는 매우 독특한 교리이다.
그것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되어진다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긴장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서 드러내는 표현들이 된다. 은혜가 구원의 수단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행위가 언급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은혜만을 강조하며, 행위를 무시하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행위만을 강조하며, 은혜를 무시하게 된다. 사실, 그들의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은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얼마나 지켜내기 어려운 지를 드러내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성경은, 공교롭게도, 이러한 두 가지 소위 "구원의 수단"에 대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둘 사이에 하나의 시간적이거나 논리적인 질서를 담아놓고 있다. 그러한 질서에서 선봉에 "은혜"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뒤에 "행위"를 놓는다. 기독교에서 이 둘은 구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됨을 보여주는 논리구조가 된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행위를 지킨다"는 구조라고 보면 되겠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으면 좋은데, 아니,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에 제시된 뚜렷한 방법인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은혜냐 행위냐의 극단적인 노선을 택하면서, 보수냐, 진보냐, 자유주의냐, 개혁주의냐, 복음주의냐, 더 나아가서, 이단이냐 등등의 다양한 진영을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기본적이면서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구원의 교리를 극단적이고 근시안적인 방법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원시안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안에 요구된다고 본다. "내 생각에는"이라는 접근방법이 아닌 "누구는 이렇게 주장한다"는 접근도 아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는 접근방법에 동의하면서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새로운 시간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한다.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혼자였다. 아내도 딸들도 없었다. 이제는 둘다 있다.
동시에, 지금은 그 때보다 인생에 있어서 훨씬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 부족해서 과감히 떠났다. 그런데,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 내면에서는, 아직도, 안타까움에 새벽잠을 깨우지만, 그 때마다 침대는 몸을 끌어당긴다.
떠오르는 얼굴들과 안타까운 상황들도 힘들다.

기도와 말씀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임을 알기에, 예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된다.
주님처럼 완벽하지 않으니, 내 안에 있는 약함과 악함도 점검하고 정비하려고 한다.
이제, 웹사이트 관리도 않으니, 사고뭉치에 들어올 수 있게 되는구나...

감사할 것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밤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겨드린다.
회복도, 위로도, 평안도, 변화도, 그리고 그 열매도...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한다.

WTT Psalm 65:4 דִּבְרֵ֣י עֲ֭וֹנֹת גָּ֣בְרוּ מֶ֑נִּי פְּ֜שָׁעֵ֗ינוּ אַתָּ֥ה תְכַפְּרֵֽם׃   BGT Psalm 64:4 λόγοι ἀνομιῶν ὑπερεδυνάμωσαν 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