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판을 받으실 때,
갈릴리에 있어야 하는 헤롯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어서(눅 23:7)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다.
만일 헤롯이 갈릴리에 있었으면, 빌라도는 그를 헤롯에게 보내기 원하였기에, 재판을 지연되었을 것이고, 결국 유월절을 지난 후에 십자가처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셔야 했다.
반드시 그 날 돌아가셔야 했다.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하필이면,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목을 지나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실 수 있게 도왔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셔야 했다(신 21:23).
구레네 시몬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시는 걸음을 도왔다.

하필이면,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님 편에 서 있어서
예수님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부자의 무덤에 묻히셔야 했다(사 53:9).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를 담당하였기에, 예수님은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내신 바 되게 되었다.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하필이면,
나는 이 부모를 만나고, 이 가족을 만나고, 이 아내를 만나고, 이 딸들을 만나고,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이 동역자들을 만나고, 이 교회를 만났다.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이 "하필이면" 이렇게 함께 하시는 걸음에, 감사를 느낀다...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시각의 차이

누가복음 22장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So he consented and sought an opportunity to betray him to them in the absence of a crowd. (Luk 22:6 ESV)

가룟유다의 시각에는 예수님께서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하는 시간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정기적으로 기도하시면서, 홀로 계셨는데, 그 때를 “무리가 없을 때”로 간주한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만찬 뒤에,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로 나아가 예수님이 가장 무능력해 보이는 시간에 예수님을 덮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의 정점을 향해 가고 계셨고, 그래서 가장 최선의, 최고의, 그리고 최장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시간을 만끽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몸은 지쳐 계실 수 있지만, 사람들도 없었고, 무방비 상태처럼 보였으나,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을 새시면서 기도하신 시간을 통해서 가장 완벽하게 준비되신 상태에 계셨다. 바로 그 상태에서 십자가처형의 걸음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유다가 예수님의 가장 약한 상태라고 판단하였던 "무리가 없을 때"가 예수님께는 가장 강하신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과 치욕의 길을 걸으실 수 있었다. 예수님의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승리"로 장식하실 수 있으셨다. 마지막까지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이… 자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떼리며 온갖 모욕을 일삼는 이들을 향해…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고통하시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해 나가시는 과정을 호흡처럼 느끼시면서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십자가"영역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신 것은 (물론, 삼일 후에 하나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부활"영역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셨다) 바로 이 기도의 무장의 완벽성을 증명하는 사건들이었다.

유다가 예수님의 가장 약한 상태라고 판단하였던 "무리가 없을 때"가 예수님께는 가장 강하신 상태였던 것이다.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누가복음 11장 28절을 거듭 읽으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 But he said, "Blessed rather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keep it!"
(Luke 11:28 ESV)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예를들면, 마태복음 5장)에서 정의하여 주신 "복있는 자"의 개념 이외의 "복있는 자"의 새로운 개념인가?

그렇지 않다. 먼저는, 성경에서 "복있는 자"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불가분의 연관을 지어 설명하는 것이 일관되게 변함없이 유지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신 28:2, 잠 16:20, 시편 1편, 계 1:3; 22:7 등등).

둘째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정의하신 "복있는 자"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이루어 나가게 될 삶의 모양 내지는 열매들이 된다(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자). 그러므로, 오늘 말씀하신 "복있는 자"의 정의는 성경을 통해 계시되어진 "정의"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며 일종의 요약문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이다. 듣기를 원하여도 듣지 못하는 자들을 생각한다면, 매 주일, 그리고 주중에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아주 큰 복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너무나 흔하게 발에 채이듯 존재하는 것 같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음을 직시하는 것은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이다)이 진지하게 되새김되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 말씀을 들은대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복이다.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주초를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려보자(누가복음 6:48~49).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indicative) 지키는 것은(imperative)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언급하시는데 있어서 "듣고"라는 동사를 넣으셨을 것이다. 말씀을 들은 이후에 지킬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열심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from Indicative to Imperative).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인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요한일서 5:3,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삶과 연관된 다음의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11장 28절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일진대,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게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와 같은 맥락의 말씀일테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피조물 속에서 이루어져 나아가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에 드러나는 창조네러티브를 통해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는 기쁨(영광)이고 우리에게는 "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지는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의 이유를 "의무"(imperative)에서 발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indicative) 안에서 발견한다 (로마서 6:30). 그렇다고 한다면, 구원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는데 나아가고 그 감사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결국, 감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렇게 한 것 뿐인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또 다른 그리고 새로운 은혜의 "복"(또 다른 감사의 이유)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사가 홀연히 가슴 속 뇌리를 파고든다…

2010년 7월 9일 금요일

과연 노아는 방주를 산 위에 지었을까?


  • 들어가는 말


과연 노아는 방주를 산 위에 지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질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들어왔고 (물론, 그렇게 들어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야만 성경을 더 세밀하게 진지하게 읽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질문을 던지고, 성경을 근거로 그 답을 찾고, 그 답에서 파생하는 의미들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  성경에 근거한 고찰


먼저, 노아와 홍수사건을 기록한 성경인 창세기 6~8장을 근거로 생각해자.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셔서 방주를 만들도록 지시하시는 부분부터 방주를 만드는 부분까지를 또박또박 읽어 나갈 때, 정말 아쉽게도 어떠한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산 위에 지으라고 명령하셨다거나 노아가 방주를 산 위에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능성 즉, 방주가 산 위에서 지어졌을 것이라고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창세기 7장 17절(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에서 기인하는데, 방주가 떠오른 시점이 비가 내리면서가 아니라, 비가 한 참 내린 후인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방주의 주재료인 잣나무(고페르나무(גֹּפֶר)를 쉽게 구하려면 아무래도 산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창세기 7장 17절에 나오는 표현을 자세히 본다면, 방주가 산에서 떠올랐는지 아니면 땅에서 떠올랐는지를 구별할 수 있다. 방주는 “땅”에서 떠 올랐다. 한국어로는 “땅”으로 기록하고, 영어로는 “Earth,” 그리고 원어인 히브리어는 “  הָאָֽרֶץ ”로 기록되어 있다. 하아레쯔로 발음되는 히브리어는 지구, 땅, 육지, 영토 등등의 의미를 가지지만, “산 위” 또는 “산”과는 연관을 가지지 않는다.  동시에 잣나무(고페르나무)를 쉽게 구한다는 것이 산 위여야만 해서 산 위에서 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얻기 어렵다.

아울러,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홍수가 40일간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 비가 40일간 내렸다는 말이다(창 7:4, 12).  그래서, 이 표현이 마치 40일간의 홍수 이후에, 물이 산 위까지 차올라서 방주가 떠오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 그래서, 이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비가 40일간 내렸고, 그렇게 비가 오래 내리면서 물이 불어오르고, 방주는 “땅”에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와 홍수 사건과 연관된 내용을 기록한 신약성경을 상고해보자.

첫째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노아”와 “방주”와 “홍수”를 언급하는 것을 본다. 마태복음24장 36~39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동시에 누가복음 17장 26~27, 30절은 이렇게 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이 두 부분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시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기 위함이었음을 본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관심은 방주를 지은 위치가 아니라, 노아와 홍수사건이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데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시작하는 최후의 구원과 심판(Salvation and Judgment)과 맥을 같이 하면서, 하나님만 아시고 갑작스럽기 때문에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매일매일 감사함으로 성실하게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노아”의 이름은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의 걸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督勵)하는 곳이다. 그 곳에서 노아는 7절에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이 곳에서도 노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구원에 이르렀음을 언급하고 있지, 방주를 어디에 지었는 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관심사는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인간의 계획과 열심 또는 욕심과 경쟁 등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지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었음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노아”의 이름은 베드로전서 3장 20절(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에 언급된다. 이 부분에서 “노아”와 “방주”는 하나님께로의 순종의 대명사이고 그 결과가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노아의 8식구만 구원받았다는 창세기 7장 13절(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의 내용을 정확한 숫자로 다시 한 번 명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노아”의 이름이 기록된 베드로후서를 살펴보자. 베드로후서 2장 5절(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은 위의 누가복음 17장 26~27, 30절에서 언급되어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사건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에서 유혹과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반드시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을 위로 및 격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아와 홍수 사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세상을 주권적으로 심판하신 것이고,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과 심판”을 이루실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께서 “방주”를 산 위에 짓도록 명령하셨다거나, 노아가 “방주”를 산 위에 지었다는 말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동시에, 노아와 홍수사건을 평가하는 신약성경은 “방주”의 의미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믿음의 순종의 상징임을 증거함으로써, “지금여기(Here and Now)”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예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함을 피력하고 있음을 또렷하게 알게 된다.


  •  성경적 답변에서 찾는 의미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 즉, 노아가 방주를 산 위에 짓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을 떠나서 사람이 없는 곳(예를들면, 산 위)에서 몰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분명하고 떳떳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특별한 장소나 거룩히 구별된 곳이나 특별한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먹고 자며 일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는 노아가 살고 있는 삶의 “지금”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삶의 “지금”을 떠난 특별한 시간이나, 거룩히 구별된 시간이나, 특별한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먹고 자며 일하고 생활하는  삶의 “지금”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진 것이다.
이 둘을 합하여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노아의 삶의 시공(時空) 속에 다시 말해 “노아의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역사는 곧, “방주”를 만드는 것이고, 이 방주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신이시고, 세상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공표(公表)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노아와 홍수사건을 이해할 때, 방주를 산 위에 지었다는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잘못된 성경이해와 해석으로 나아가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방주는 어디에 감추어져서 몰래 준비된 구원의 계획이 아니고, 특별한 장소나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인물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와 시간 속에서 즉,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와 시간 속에서 묵묵하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견고하고 건전한 이해(Solid and Sound Understanding)임을 알게 된다.

이렇듯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와 시간 속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얻는 자의 수를 8명으로 제한하여 두셨고, 노아의 8식구 외에는 아무도 그 방주를 통한 구원의 계획에 들지 못했다(창 6:18~22). 만일 누군가 죄의식을 가졌거나 뉘우침을 가져서 방주에 동승함으로써 그 구원의 대열에 끼여들어도 문제가 될 수 있을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은 홍수가 있기 5년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노아의 할아버지이자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969세)인 므두셀라도 홍수가 있던 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적어도 성경에 드러난 숫자를 셈해본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 8명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방주”와 연관한 “마지막 논의”를 진행해 보자.


  •  마지막 논의 (우리가 집중해야 할 바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방주가 구원의 방편이었지만, 노아의 8식구 외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God’s Sovereign Grace)”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신 것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Unconditional Grace of God)였음을 우리는 창세기 6장 8절과 9절의 행간(行間)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는 창세기 6장 9절이,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기록하는 창세기 6장 8절보다 뒤에 언급되었음에서 발견된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노아였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와 홍수사건을 “방주”와 연관하여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발견할 수 밖에 없고, 그 은혜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일어서게 된다. 노아(곧, 8명)를 무조건적인 은혜로 부르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如前)히” 하나님의 백성들(곧, 정해진 인원)을 부르셔서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노아를 무조건적인 은혜로 부르셔서 방주라는 구원의 방편 안으로 넣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如前)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은혜로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편 안으로 넣으시고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유비(類比, analogy) – 즉, 방주는 궁극적인 유비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 를 “예수님과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큰 틀 안에서 발견하고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방주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로운 구원의 방편이었기에 노아(곧, 8명)는 그 방주 안에 있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로운 구원의 궁극적 방편이기에, 하나님의 백성들(곧, 정해진 인원)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안에 있음은 방주 안에 있음과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방주는 일종의 그림자로서 본체이신 예수님을 보여준 것이기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 안에 있음은 예수님이 그들 안에(요 15:7)) 동시에 존재하심으로써, “연합”(Un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

이 마지막 논의를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서 시작된, 방주를 통한, 노아구원계획은 결국,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신 뜻과 섭리(燮理, Economy)를 나타내신 사건이었던 것이다.


  •  나가는 말


우리는 이 글을 “과연 노아는 방주를 산 위에 지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구약의 창세기와 신약의 마태복음, 누가복음, 베드로 전후서와 히브리서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분명한 답을 얻었다. 그것은 노아는 방주를 산 위에 짓지 않고, “땅” 곧, 그가 사는 삶의 현장 곧, 그의 삶의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지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숨어서 몰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사람이 사는 삶의 현장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방주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상징적 도구로서 믿음의 순종으로 결과물이었으며, 앞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시간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과 심판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걸음을 예수님을 의지하여 걸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논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아의 8식구에 대한 부분이 명시된 창세기와 베드로전후서, 그리고 암시된 히브리서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God’s Sovereign Grace)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즉,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것으로 나아갔다. 노아의 8식구도 21세기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은혜로 인하여 방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임을 생각하였다.

결국, 우리가 방주를 생각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한 “구원”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노아의 8식구의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졌으며, 이제는 21세기를 사는, 예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인 “지금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분투하고 있는 삶의 현장인 “지금여기”의 문제들과 어려움들, 도전들과 숙제들, 유혹과 핍박을 우리와 연합하여 단번에(Once for all) 구원을 허락하시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의 여정을 지속적으로(Ongoingly) 인도하여 나가시는, 방주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탁하며 삶의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 각자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10년 5월 3일 월요일

On the Life~

Life~~... today, I am still alive... to be able to... think, feel, decide, do good, go, stop, come, turn, be active, be passive... for the ONE... who gave "it" to me and... of whom I become know more as I survey the wondrous cross... Life~~

2010년 4월 24일 토요일

물에서 물로의 회복을 소망하며

배로 인한 사고가 한국에서 발생한 지 한 달여 되어간다.

천안함 사고와 연관된 쌍끌이 어선의 실종사건, 그리고 한국유조선의 납치사건이 어쩌면 그렇게 시기에 틈을 주지 않고 발생했는가? 마음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왠지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든다. 바다와 연관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한국의 4대강 사업도 "물"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슈가 아닌가 싶다. 한국을 떠나 있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한국을 떠나 있기에, 더욱 더 한국에 대한 애착이 생긴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물"과 연관된 이러한 연속된 사건들과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성경에 보면,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노아의 홍수'일 것이다. 노아시대에 있었던 홍수사건을 말함이다. 물의 부정적인 의미가 그 사건으로 인해 성경 전반에 흐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장 먼저 만난 난제가 '홍해'였다. "물"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의 손에서 인수받아 인도자로 첫 걸음을 내딛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난제가 바로 '요단강'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지내면서 불평했고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도 바로 "물"이었다.

물론, 물을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세례요한과 연관을 가지고 볼 때, 물은 매우 긍정적인 요소임에 부인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례와 연관하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음을 보게 된다(요 3:5). 예수님 당신도 자신을 향해 나는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 즉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셨음을 보게 된다(요 4:14; 6:35)

그러나, 성경 전반적으로 볼 때, 물은 하나의 혼돈과 악을 의미할 때, 쓰여진다. 동시에, 성경은 이러한 부정적인 부분에서 떠나 다른 한 곳 즉, 긍정적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변화 내지는 회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어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구원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요소인 소위 "수분"과 연관되어져서도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에는 "바다가 없다"(1절). 바다가 없어서 물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곳에는 "생명수"가 있다(6절). 즉,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수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난과 어려움을 상징하는 물이 없어지고 행복과 만족을 상징하는 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것이다(요 4:14; 6:35). 바로 이러한 회복을 맛을 경험하기 원한다. 바로 소위 "물" 때문에 힘들어 하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물,"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장로님이라는 조건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조건과 관계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의 믿음과 성실함과 관게없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나의 연약함과 추악함을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조건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실존적으로 변화된 신분과 그 신분에 늘 성실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분으로 자리잡고 계신다는 조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구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회복하여(고쳐) 주시옵소서!"

2010년 4월 15일 목요일

블로깅삶

일상에 떠오르는 많은 사고들(thoughts)을 모아낼 수 있다면,
삶의 내용도 모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고를 모아내는 방법들도 변화했다.
종이에 적어내던 시절이 있었고, 데스크탑에 적어내던 시절도 있었다.
랩탑과 팜탑에 적어내던 시절이 공존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우리의 생각들을 적어내며 공유하고 나누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블로깅은 그러한 공유와 나눔을 위한 몸부림의 한 파편이 될 것이다.
변했고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 변하게 될 방법들 중에,
현재와 미래의 가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상에 떠오르는 단상들이 모아지고 정리되어져서
먼저는 나의 인생의 걸음을 추스리고
혹시라도 나누어진다면 그 유익들이 공유되어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사고뭉치*를 이루기 시작한다.


*"사고뭉치"는 이러한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쉬운 사고들의 조각들이 모아져 이루게 될
큰 사고의 덩어리(The Bundle of Thought)를 의미한다.

WTT Psalm 65:4 דִּבְרֵ֣י עֲ֭וֹנֹת גָּ֣בְרוּ מֶ֑נִּי פְּ֜שָׁעֵ֗ינוּ אַתָּ֥ה תְכַפְּרֵֽם׃   BGT Psalm 64:4 λόγοι ἀνομιῶν ὑπερεδυνάμωσαν 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