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부터 구별시키는 매우 독특한 교리이다.
그것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되어진다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긴장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서 드러내는 표현들이 된다. 은혜가 구원의 수단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행위가 언급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은혜만을 강조하며, 행위를 무시하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행위만을 강조하며, 은혜를 무시하게 된다. 사실, 그들의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은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얼마나 지켜내기 어려운 지를 드러내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성경은, 공교롭게도, 이러한 두 가지 소위 "구원의 수단"에 대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둘 사이에 하나의 시간적이거나 논리적인 질서를 담아놓고 있다. 그러한 질서에서 선봉에 "은혜"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뒤에 "행위"를 놓는다. 기독교에서 이 둘은 구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됨을 보여주는 논리구조가 된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행위를 지킨다"는 구조라고 보면 되겠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으면 좋은데, 아니,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에 제시된 뚜렷한 방법인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은혜냐 행위냐의 극단적인 노선을 택하면서, 보수냐, 진보냐, 자유주의냐, 개혁주의냐, 복음주의냐, 더 나아가서, 이단이냐 등등의 다양한 진영을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기본적이면서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구원의 교리를 극단적이고 근시안적인 방법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원시안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안에 요구된다고 본다. "내 생각에는"이라는 접근방법이 아닌 "누구는 이렇게 주장한다"는 접근도 아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는 접근방법에 동의하면서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2014년 7월 2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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